환영과 실재를 가지고 노는 새로운 방법 – 권오상 - GWON OSANG

Criticisms

환영과 실재를 가지고 노는 새로운 방법 – 권오상

2006.12.20

이정우 | 월간 아트인컬처 편집장

'1990년대적인 것’들을 뒤로하며

2004년 2월 17일,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리얼 리얼리티》전의 오프닝에서 권오상은 모든 ‘90년대적인 것’들을 뒤로한 채 작지만 의미심장한 승리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는, 국제갤러리의 《리얼 리얼리티》전을 통해, 1990년대가 만들어 놓은 당대미술의 지형 위에서 진행되어온 2차 베이비부머 세대 작가들의 모호한 경쟁체재에서 처음으로 상업적 성공의 문을 두드린 작가가 됐기 때문이었다. (2차 베이비부머는 1970년대 초․중반 태생들을 말한다. 한국의 전후 출산통계의 그래프는 쌍봉낙타의 등처럼 두 개의 나란한 봉우리를 그린다.

1차 베이비부머들은 1960년대 중․후반에 태어난 이들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386 세대의 주축이 바로 그들이다. 1971년 즈음에는 인구 증가가 잠시 주춤하다가, 다시 1970년대 중반에 이르면 인구가 폭증한다. 그때 태어난 이들이 2차 베이비부머들로, 바로 대중소비문화를 이끈 서태지 세대가 그들이다.) 《리얼 리얼리티》전은 국내의 상업화랑 시스템이 30대 초반의 젊은 한국 현대미술 작가들을 내세운 첫 사례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리얼 리얼리티》전은 형식적으로는 배병우(1950년생), 권오상(1974년생), 이윤진(1972년생), 이중근(1972년생)의 4인전이었으나, 실제로는 권오상, 이윤진, 이중근의 3인전이었다.) 게다가 전시오픈 이후 바로 준비한 에디션의 다수가 판매됨으로써 “한국에도 젊은 내국인 작가들의 작업을 소화할 수 있는 시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그렇다면 새로운 틈새시장이 개척된 것일까? 아니나 다를까, 얼마 뒤인 2005년 2월, 권오상은 씨 킴(김창일) 회장이 이끄는 아라리오 갤러리의 전속 작가로 발탁되어 세간의 이목을 한데 모았고, 곧 1년간의 휴지기에 돌입했다. (2006년 현재 아라리오 갤러리의 한국인 전속작가는 권오상, 구동희, 이형구, 정수진, 백현진, 박세진, 이동욱, 전준호의 총 8명이고, 중국인 전속작가는 보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왕광이, 위에 민준, 장 샤오강, 류 지엔화, 수 지엔 구어, 팡리준, 쩡하오의 총 7명이다.)
 
한국 미술계의 최근 상황은 기묘하다. 사실 최근 몇 년 동안은 예측 가능한, 지루한 상황이 지속됐다. 그러나 때가 되면 ‘양질전환’의 단계가 오는 법인지, 드디어 변화가, 지루한 ‘1990년대적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는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오늘의 미술계 판도를 조형해낸 1990년대적인 가치체계의 구축에는 1993년의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전, 1998년의 《도시와 영상》전, 아트선재센터의 전시들, 쌈지레지던스 프로그램의 운영, 풀, 사루비아, 루프 등 대안공간들의 등장이 미술계 내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행했다. 그러나 1998년의 《도시와 영상》전 이후 대두된 새로운 청년 작가들이 형성한 소위 ‘젊은 작가붐’이라는 거품은 상업적 성공과는 무관했으며, 그나마 성공의 열매는 모조리 이불, 최정화 세대의 차지였다.

그러나 이미 이불은 힘껏 소비되어 지쳐버린 모습이고, 한때 경쟁에서 뒤쳐진 것처럼 보이던 최정화는 1990년대를 모조리 사유화해낼 기회를 내던졌다(최정화의 첫 미술관 개인전이 2004년 10월, 로댕 갤러리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취소됐다. 하마터면 ‘승리’는 그의 것일 수도 있었는데). 이러한 새삼스러움은 주요 전시 공간들의 변화에 따른 것일 수도 있다. 1990년대적인 가치의 쇠락은 2004년 2월 호암갤러리의 폐관 이후 가시화되기 시작했고, 2004년 12월 김선정 부관장의 아트선재센터가 문을 닫은 이후 본격화된 느낌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뿐만은 아니다.
 
최근 대안미술공간들은 큰소리치던 초기의 뜻과 달리 소위 ‘유학파’ 작가들의 귀국전 통로가 되어버린 모습이고(어쩌면 애초에 뜻이 그랬던 것일 수도?), 자신들이 선택한 특정 작가군과 함께 조로하는 중이다. 대안공간 루프는 난데없이 빌딩을 짓더니 2005년 말 어설픈 상업화랑으로 변신했고, 대안공간 풀은 2005년을 마지막으로 인사동 시대를 접고 구기동으로 이사를 갔으며, ‘사실 한번도 대안공간이었던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인사미술공간은 2006년 관훈동으로 이사를 가며 ‘이제는 아카이빙과 연구개발에 집중하겠다’고 (즉, 전시에 신경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쌈지스페이스, 쌈지레지던스, 쌈지미술창고, 쌈지갤러리, 쌤쌤회관 등으로 분화․전개된 쌈지의 미술사업은 김홍희 관장이 2006 광주비엔날레의 기획에 집중하는 사이 기획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이고(그래도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선발된 작가의 질은 2005년이 2004년보다 훨씬 나았다), 노소영 관장이 이끄는 아트센터 나비의 경우, 그간 돈은 꽤 썼는데도, (쌈지나 선재와 달리) 미술계에 끼친 영향으로 보면 그 존재감은 여전히 미미할 뿐이다. 물론 새로운 삼성미술관 리움이 2004년 10월에 개관함으로써 조로증에 시달리는 한국 미술계에 잠시 신선함을 선사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1990년대적 가치의 몰락을 부채질하는 새로운 힘의 축에 다름 아니었다. 자, 그렇다면 과연 권오상을 필두로 한 아라리오의 작가들은 새로운 판도를 펼쳐 보일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권오상이 두 번째 개인전을 앞둔 2006년 2월은, ‘어벙한’ 동시에 ‘아방한’ 묘한 시점이다.
 
한때 권오상은 ‘쌈지레지던스 프로그램에 3번이나 응모했지만 번번이 떨어진’ ‘재능은 있지만 운 없는 국내파 작가’라고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국제갤러리의 전시 이후, 아라리오의 전속작가가 된 이후, 그를 운 없는 작가로 볼 사람은 거의 없을 터이다. 오는 2006년 3월, 그의 두 번째 개인전에서 새로운 작업들을 보기 전에, 그의 지난 작업들을 한번 찬찬히 살펴보기로 하자.

 
작업의 남상: 가벼운 조각을 만들고자

데이비드 호크니의 파노라마 사진 작업을 삼차원의 입체로 변환해 놓은 듯한 권오상의 사진-조각들은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강렬함을 가졌다. 1998년에 제작한 ‘증명의 강요’ 연작이나 〈힘에 관한 집착적 레포트〉 등은 권오상의 초기 작업들로, 약간의 아마츄어적인 미완성의 느낌을 주지만, 그 강렬함만큼은 동일하다. 1998년의 작업들은 작업실 책상에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크기가 작고, 또 안은 텅 비어있다. 파노라믹 몽타쥬에 의해 조각적 매스를 구축한, 다시 말해 사진을 붙여나가며 입체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러한 애초의 작업과정은 꽤 중요할 수 있다. 모델의 신체를 일일이 부분별로 동일 광원 하에서 촬영하고, 그렇게 촬영한 필름을 프린트해 이어 붙이는 작업이 (모델 없이) 조각적 결과를 낳는다는 작업논리는 현대미술의 역사에 전례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점차 테크노 바로크적 공예로 몰락해가는 사진예술의 가문과 이미 몰락해 직계 상속인을 찾기조차 어려워진 조각예술의 가문의 사이에서 태어난 권오상의 작업은 사실, 탄생 초기부터 무궁한 가능성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홍익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한 작가는, 나에게 말하길, “애초에 작업의 핵심은 ‘가벼운 조각’을 만드는 데 있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의 사진-조각은, 영락없는 사진 작업으로 보이긴 해도, 분명 조각예술 가문의 적손이었던 것이다. (작가 강영민의 홈페이지에 가면 링크 모음 페이지에 권오상의 홈페이지가 소개되어있는데, 놀랍게도 소갯말이 ‘조각가 권오상’이다. 권오상은 미술계에서 사진작업을 하는 사람으로 통용되어 왔지, 조각가로 대접받은 적은 없었기 때문에, 내게 강영민의 표현은 무척 낯설었다.) 하지만 작가는 사진으로 이루어진 표면과 조각적 매스의 관계에 대해 그리 치밀하게 계산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1998년에 작업한 초기 작업들은 오로지 인화지로만 만들어진 종이-조각이었기 때문에의 내구성이 형편없이 모자랐고, 곧 그는 작업 사이즈를 키우며 종이-조각을 지탱해줄 ‘내부 구조’물을 만들 게 된다. 인화지의 연속이 입체를 형성하는 초기의 작업논리는 이내 포촘킨 파사드(오늘날 허구적인 눈속임 건축을 지칭하는 이 단어는 18세기 후반 그레고리 포촘킨이 카트린느 대제를 위해 만들었던 가짜 건물들의 입면들에서 유래한다)의 미학으로 전환됐다. 따라서, 이후 권오상은 방송국 세트 같은 허구적 조각의 세계를 깨나 흥미진진하게 변주해 보일 수 있었다. (작업조건의 느슨한 규정이 작가의 준-자율성을 어느 정도 보장했던 셈이다.)

 
TV 세트처럼 포토제닉한 사진-조각의 전개

권오상의 첫 번째 대형작업인 〈집착으로 구성된 440장의 가족 사진〉은 1999년에 완성됐다. 부모님의 좌상인 이 작업은 금속 프레임을 제작한 첫 작업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내구성에 문제가 생겨 작업실에 부분 파손된 채 보관 중이다. 기록사진을 보면, 이 작업은 작가 자신과 부모, 형제 네 사람의 가족사진과 함께 전시됐는데, 그를 통해 유추해보자면, 어쩌면 애초에는 네 명 모두를 사진-조각으로 제작할 생각이었을 것 같다. 그러나 ‘가벼운 조각’이라는 애초의 목적에 적확하게 들어맞는 작업은 같은 해에 제작된 〈참을 수 없는 무거움〉이었다. 바위를 촬영해 만든 바위조각은 쉽게 포착되는 부조리를 이뤘고, 내부는 우레탄 폼으로 채워졌다. 그러나 그가 바위를 뒤집어 땅에 닿은 밑면을 촬영하는 수고를 감내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결국 이 작업의 과정 또한 포촘킨 파사드 같은 눈속임인 것. 엄정한 모더니스트 영웅들은 권오상을 혐오해야 마땅하다.
 
반면, 커다란 한 장의 프린트를 구겨 만든 입체 작업인 〈꿈같은 여행에 대한 구겨진 계획서〉(1999년)는, 모호한 맥락으로 인해 부조리를 형성하지 못한 채, 의미망의 사면을 미끄러져 내린다. 그가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못한 작업”이라고 표현한 이 연작은 좀 지나치게 ‘작품’같아 보이려는 경향을 보였다. 굳이 대중목욕탕 욕조 위에 ‘설치’된 것도 작위적이었지만, 연작의 일부인 〈구겨진 여행〉의 경우에도 왜 구겨 만든 사진-조각들이 뒤틀어진 나무 프레임 가운데에 박혀있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뒤틀어진 액자들은 ‘구겨진 현실’을 상징하는 메타포인가? (부디 아니길. 현대미술계에서 ‘은유’만큼 ‘허접한 것’으로 취급받는 어법은 아마 ‘표현’밖에 없을 것 같다.) (구겨 만든 조각은 아직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초기의 작업과 달리, 평창동의 풍경을 한 칸의 유리창 프레임에 구겨 넣은 〈평창동〉(2002)의 경우 매우 성공적이다. 권오상의 작업 가운데에는 드물게 장소-특정적인 이 작업은 풍경과 사진촬영, 프레임의 문제, 그리고 프린트를 구겨 만든 입체로서의 결과 등을 일거에 적절히 설명해냈다. 물론 작업과정에서 창문을 떼어내고 촬영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1999년에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작업은 아마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형상을 따온 〈미술이 가지는 절대적 권위와 숭배에 관한 280장의 진술서〉였을 것이다. 무척이나 포토제닉한 이 작업은 종교적 도상과 마샬 아리스만을 연상시키는 일러스트레이션적인 구성 덕분에 무척이나 눈길을 끄는 작업이 되었다. (어쩌면 이 작업이 권오상의 득의작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당의정을 입힌 서사는 뇌에서 금세 물리는 법. 예수처럼 매달린, 개의 머리를 한 남자의 나신과, ‘ART’라고 적힌 죄명은 작품제목처럼 너무 장황했다. 따라서, 불과 5년 전의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무척 낡은 이미지 같아 보이고, 또한 작가도 이를 약간 창피하게 여기게 됐다.

 
다양한 작업 논리의 모색

반면 같은 해에 제작된 〈쌍둥이에 관한 540장의 진술서〉와 〈쌍둥이에 관한 420장의 진술서〉는 지금 보아도 안정된 모습이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업들은 기본적으로 애초의 사진조각에 충실한 상태에서 약간의 고전적 부조리를 덧붙인 모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견상의 안정감과는 달리, 작업을 구성하는 논리의 구조에서는 사진-조각으로서의 회로와 자끄 까렐망 식의 부조리 조각으로서의 회로가 서로 적절한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상충하고 있는 듯, 어딘지 불만족스럽다. 물론 이 작업들을 동일한 프린트를 반복해 동일한 조각 쌍으로 만들었을 경우에 발생하는 비교 가능한 차이에 대한 연구라고 주장한다면 내가 제기한 ‘부조리 조각’의 의심은 기각될 것이다. (머리를 작게 축소한 〈300장으로 구성된 축소의 강요〉(2000) 또한 사진의 축소에 연구라고 한다면 작업 논리의 방어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작업회로의 상충구조는 인간의 몸에 오리 머리 셋을 붙여놓은 〈다중시야에 대한 360장의 진술서〉(2000)에 이르면 변명의 여지가 없어지고 만다. 따라서 나는 〈340장의 나른함에 관하여〉(2000)처럼, 이질적 요소의 병치나 인위적 스케일 변형이 없이 덤덤하게 사진의 재현과 그에 바탕을 둔 입체작업을 선호한다. 확대 프린트를 통한 업-스케일링 조각 작업으로 독해 가능한 〈거세된 입구〉(2000)와 〈재조합된 꽃잎〉(2000)도 좋아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일관되지 않은 작품 제목에 약간의 불쾌감을 느낀다. 대개 작품을 완성한 뒤 작명했을 것으로 보이는 장황한 제목들은 좀 어깨에 힘이 들어간 느낌이라 듣기에 불편하다. (물론 소모된 프린트의 수가 명기된 경우, 애초에 사용된 프린트의 가짓수가 정해져 있으니 숫자는 미리 결정된 것일 터이다.)

작가는 “제목들이 작업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제목을 〈무제〉에 가까운 느낌으로 짓고자 노력했다”고 말했지만, 꽃술 없이 꽃잎만 재현된 꽃의 조각을 놓고 〈거세된 입구〉라고 명명한 마당에 ‘무제’라는 느낌을 갖기는 좀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나는 무뚝뚝한 작품인 〈여행용 가방〉(2000)에서처럼 덤덤한 제목을 좋아한다. (쓰레기를 가득 담은 종량제 쓰레기봉투를 재현한 〈무의미한 배출〉(2000)의 제목도 그냥 〈쓰레기〉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무제에 가까운 제목이라면 설치 작업 〈쾌적한 여행〉을 구성하는 단품인 〈무의미한 360장의 진술서〉(2000) 정도가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다.

 
데오도란트 타입

권오상은 2001년 개인전을 열면서부터 작가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데오도란트 타입’이라는 알레고리를 타이틀로 내건 그의 첫 개인전에서는, 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맥락이 발견됐다. 얼핏 들으면 사진 프린트 방식의 이름 같기도 한 데오도란트 타입은 니베아 데오도란트에서 빌어온 것이다. 겨드랑이에서 나는 암내를 은폐하기 위한 데오도란트가 한국에서 잘 팔릴 리 없었지만, 최소한 권오상이란 작가의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했다. 그렇다면 데오도란트란 알레고리는 정확히 어떤 사회적 서사를 끌어오는가? 데오도란트 타입이란 이름이 얄팍한 눈속임의 효과를 지니듯, 그의 작업들은 은폐와 눈속임 효과를 둘 다 발휘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이 전시는 은폐되는 TV 세트적 구조와 사진의 일루저니즘에 대한 것인가?
 
이 전시에서 우선적으로 주목을 받은 작품은, 홍보 포스터 이미지로 활용된 〈350장으로 구성된 뷰파인더에 관한 진술서〉(2001)였다. 이는 다시 한번 종교적 도상을 활용한 작품이었다. 바닥에서 떠 있도록 설치된 작업은 현세의 삶을 상징하는 아미타 수인을 한 외계인 같은 나신을 보여주는데, 나는 이것이 다른 작품과 어떤 관계에 놓인 것인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전시를 즈음해서 그의 작업들에는 상업광고의 특정한 미적 측면이 차용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권오상의 작업 노트들을 훔쳐보니, 광고와 패션지 등에서 스크랩한 이미지들이 많았는데, 우선적으로 눈에 띠는 것은 모델의 자세를 차용한 것이었다.

동일한 인물로 구성된 샴쌍둥이가 서로 싸우는 모양의 〈뒤엉킨 480장의 진술서〉는 구찌의 광고에서 자세를 차용, 변형한 것이고, 한쪽 다리를 펴고 바닥에 주저앉은 여자를 만든 〈무의미한 360장의 진술서〉(2000)는 웅가로의 광고에서 연원한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괴석을 재현한 듯한 〈중국식 정원〉은 어디에서 연원한 것일까? 작가의 대답은 자못 흥미롭다. “저는 광고에 관심이 많아요. 제가 이 작업을 할 즈음에 한참 ‘젠’ 스타일이 유행이었어요.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의 문화가 서구인들에게 오리엔탈리즘으로 수용되고, 다시 그 오리엔탈리즘이 90년대에 복고로 재유행하더니, 그것이 다시 한국 같은 나라에 수입되어 기이한 형태의 패션으로 유통되는 과정이 흥미롭더군요.” 나는 그때 비로소 전시의 숨은 맥락의 일부를 알게 됐고, 신기한 비밀이라도 깨달은 듯, 살짝 달뜬 기분이 들었다.
 
자세히 보면, 개인전 이후 제작된 사진-조각들은 모두 광고에서 차용된 어떤 특정한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요가 자세로 앉은 남자가 손에 비누거품을 묻히고 있는 〈텐더〉(2002)의 경우도 그랬다. 작가의 작업 파일엔 스크랩한 광고 사진이 가지런히 모아져있었고, 특히 디오르 광고에 등장한 비누거품의 이미지들과 또 그 광고를 차용한 국내 패션지의 화보 사진들이 눈에 띠었다. 세상에, 그는 생각보다 주도면밀하고 꼼꼼한 작가였던 것이다. 국제갤러리에서 선보였던 사진-조각 세 점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대학 동기 세 명을 모델로 한 작업들은 꽤 팽팽한 긴장감을 연출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선 채 후드 티를 입고 있는 남자 ― 〈액션 샘플러〉(2003)는 어어부 프로젝트로 이름난 가수 겸 시인 백현진이고, 풀숲에 머리를 박고 있는 남자 ― 〈하이드 파크〉(2003)는 괴상한 광학 가제트들을 만드는 작가 이형구이며, 허리를 뒤로 꺾은 자세로 구두 자랑을 하고 있는 여자 ― 〈미스〉(2003)는 위트 넘치는 비디오 작업으로 인기 있는 작가 구동희기 때문이다. 작가의 파일을 들춰보니 〈미스〉의 경우는 요가 자세의 인형을 내세운 디젤의 광고에서 자세만 차용한 것이다. (그밖에도 허리를 뒤로 꺾은 자세를 보여주는 광고 스크랩들이 더 눈에 띠었다.) 나머지 두 작업의 경우도 정확한 연원을 찾아내거나 유추하기는 쉽지 않지만, 분명 그러한 전유의 차원을 갖고 있을 터이다.
 
젊은 작가들에게 첫 개인전은 대단히 중요한 통과의례다. 사람들이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개의 작가들은 실망하게 되고, 냉정한 현실에 좌절감도 느끼게 되지만(전시가 좋아야 잡지와 신문에 리뷰가 실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아는 작가들은 의외로 드물다.), 그래도 좋은 전시는 보이지 않는 교두보를 마련해주는 법이다. 권오상의 개인전은 아트선재센터의 김선정 부관장의 눈에 띠었다. 그리고 그는 묘한 자세로 엉킨 사이좋지 않은 쌍둥이(〈뒤엉킨 480장의 진술서〉)를 구매했다. 권오상에게는 첫 작품 판매였다. 작가는 이후 자신감을 얻었다고 했다.

작업에 대해서도 그랬겠지만, 아마 내구성이 부족한 작업의 판매에 대해 그랬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전만 하더라도 그는 판매를 위해 사진-조각에 사용된 프린트들을 에디션 개념으로 큰 액자에 넣어서 유통시켜볼 생각도 해보았기 때문이다. (실제 전시에서도 사진-조각과 함께 사용한 프린트들을 평면으로 늘어놓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그런 작업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이렇게 눈 밝은 콜렉터의 작은 선택은 작가에게 돈 이상의 큰 힘이 되는 법이다. (역시 개인전에서 선보였던 개 조각 ― 〈280장의 두려움〉(2001)은 일본에서 전시할 때 판매되었다. 이 젊은 작가에겐 첫 해외 판매였다.)

 
소포모어 콤플렉스의 가벼운 극복

작가들은 (반짝거리는 아이디어로 승부를 건 경우일수록) 소포모어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법이다. 하지만, 권오상은 가볍게 그 과정을 비켜갔다. 2002년부터 그는 아주 인기 있는 작가가 되어 해외의 크고 작은 전시에 불려 다녔다. 이렇게 시스템에서 소비되기 시작하면, 많은 작가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새로운 작업을 내놓지 못한 채 눈앞의 전시 일정에 맞추느라 에너지를 허비하게 되는 수가 많다. 권오상 또한 마찬가지다. 술자리에서 그는 “너무 바빠서 서른이라는 나이를 맞이했는데도 우울한 느낌을 가져볼 틈이 없었다”고 특유의 조용한 말투로 웅얼거렸다. 그러나 그는 다른 동년배 작가들과 달리 새로운 연작인 ‘The Flat’(2003)으로 시간을 벌었다. (물론 약간의 작업비도.) ‘The Flat’ 연작은 그가 앞으로 크게 전진할 수 있도록 고민의 시간을 벌어주는 구원의 작업이다. 게다가 이는 그의 사진-조각들과 묘한 대비를 이루는 또 하나의 ‘빅 아이디어’이기 때문에 이전의 작업들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The Flat’ 연작은 눈을 속이는 포촘킨 파사드의 극치다. 잡지에서 오린 시계사진들을 종류별로 모아 늘어놓고 사진을 찍은 이 작업은 너무나 그럴듯하여 사람들의 물욕을 자극한다. 그러나 그의 작업 속에서 바글거리는 물신들은 모두 가짜다. 종이다리로 서있는 광고들도 있지만, 어떤 것은 철사에 지탱한 채 겨우겨우 서있다. 프린트를 자세히 살펴보면 철사의 끄트머리가 보이기도 한다. 이 얄미운 작업은 심지어 앞으로 수많은 변주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 후속작이 무엇이 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작가는 후속 작업으로 GQ 3월호에 실린 모든 오브제들을 촬영해 보거나, 향수, 카메라 등을 다룰 예정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잡지 한 권 연작은 무척 근사한 아이디어가 아닐 수 없다. 그는 역시 약다.) 나는 이 평면 작업을 처음 보았을 때, 권오상이 수많은 사진작가들을 착취하고 있는 꼴이라 생각했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공들여 촬영되는 오브제들이 바로 소위 ‘명품’이라 분류되는 제품들일 것이다. 각각의 오브제들은 최상의 조건에서 최고의 사진작가들에의해 촬영된 것이다. (특히 시계처럼 반사가 되는 제품의 촬영은 촬영자와 카메라가 드러나지 않도록 집을 지어야 하기 때문에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다.) 그 정교한 시스템에 의해 획득된 각각의 미학적 봉우리들이 권오상의 ‘The Flat’을 통해 가볍게 사유화되어버린다. 이는 비난할 수 없는 ‘노략질의 예술’이다. 멋지다. 하지만 이 작업을 시작하게 된 에피소드는 더 멋지다.
 
어느 날 작업실에서 “형구형(작가 이형구)”이 느닷없이, 남대문에 가면 “금딱지 시계”가 진짜랑 똑같은데, 그걸 사서 차고 전시 오프닝에 나타나면 “죽이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권오상은 바로 그 자리에서 잡지에 있는 “금딱지 시계”를 오려서 “형구 형”의 손목에 채워줬다. 그랬더니 그럴싸하더라는 것. 그 종이 시계는 이후 한동안 작업실 입구에 놓여있는 〈쌍둥이…〉의 손목에 채워져 있었는데, 아무도 그것이 얄팍한 종이를 걸어놓은 것이란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고 한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본디 정물 사진작업을 해보려 마음먹고 있던 그는 아예 광고에서 오려낸 시계들로 ‘정물 작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형구 작가 만세.

 
슈필라움 – 다음에 펼쳐질 공간

권오상이 새로운 ‘정물사진’으로 시간을 벌었다고 해서, 기왕의 작업들이 형성한 질문과 과제들이 해소된 것은 아니다. 그는 평면으로서의 사진이 입체의 조각이 되는 과정에 대해 좀 더 정교한 역사적 논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 대한 평론가들의 언급 가운데, 가장 신경에 거슬렸던 부분이 ‘조각으로 치자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내용이었다고 말했다. 그 부분의 정확한 인용은 이렇다. “… 그의 작업을 조각으로 읽는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묘사의 의무를 사진에 떠넘긴 편리한 방식의 조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 (김승현, 〈지록위마〉전 서문, 2000) 그가 자신의 작업을 ‘조각’이라고 여기는 것이 분명해지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의 사진-조각이 현대조각이라는 고지식한 집안에서 적자로 인정받으려면 아직 해명되어야할 과정이 많다. 만약 그의 작업이 지니는 조각으로서의 역사적 위상이 더 명확해진다면, 조각의 역사는 그에 의해 역사 밖의 존재들 ― 조각의 역사에서 제외되어온 TV 세트용 조각 같은포촘킨 파사드적 존재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괴로운 심문을 받게 될 테다. 그러나 작가의 작업이 더 분명해지지 않는다면, 권오상의 사진-조각은 정서영의 개념적이되 옵젝츄얼한 조각과는 달리 명확한 ‘조각 가문의 친자’라는 역사적 권위를 획득하지 못할 수도 있다. 불행히도 입증의 의무는 작가에게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는 작품의 보존과 판매를 위해서 내구성이라는 난제를 해결해야 한다. (한동안 그는 사진-조각을 판매할 경우 하자보수를 약속했는데, 사실 이 다음에 소위 ‘성공한 작가’가 된 뒤에 일일이 하자보수를 해주기는 좀 민망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광고에서 차용되는 특정한 측면들은 아직 모호하다. 추후 보다 많은 작업들이 쌓인 뒤에야 그 숨은 맥락들은 독해와 평가가 가능한 메타서사가 되겠지만, 만약 그것이 작가의 자의적인 선택에 의한 것으로 독해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그저 ‘자아의 표현’에 다름 아닌 것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물론 걱정하기엔 이르다.

그는 이제 겨우 성공의 문을 두드린 나이 서른셋의 젊은 작가다. 앞으로 그에게 펼쳐질 공간은 그에게 꽤 많은 준-자율성을 허락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그의 오른손에는 다이아몬드 광산 채굴권(사진-조각)이, 왼손에는 금광 채굴권(평면작업)이 쥐어져있다. 다이아몬드를 채굴하려면 아직 더 고생을 해야겠지만, 일단 그는 금광을 파서 시간을 벌 것이다. (허나 평론가 할 포스터가 말했듯) 준-자율성은 전략적으로 허락되는 경우에만 유효하다. 작가가 자신에게 무원칙적인 준-자율성을 베풀 때, 무한히 펼쳐진 자유와 시간은 치명적인 독이 될 수도 있다. 권오상은 지금 기로에 섰다.

 
* 이 글은 2004년 4월 한국현대미술가연구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작성됐고 2006년 2월에 개작됐습니다.

References